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클래식 음악 상식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클래식 음악 상식


우리는 알게 모르게 클래식 음악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클래식 음악 상식은 때론 잘못된 것들이 많다. 오늘은 일반인들이 잘 못 알고 있는 클래식 음악 상식들을 알아보자.

 


 


 

1. 반짝반짝 작은별의 작곡가는 모차르트이다?


모차르트가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일명 작은별 변주곡의 제목은 정확하게 <'아, 말씀드릴게요, 어머니'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Variations on 'Ah, vous dirai-je, Maman', K 265)>이다.


그러나 원곡 자체를 모차르트가 작곡한 건 아니다. 주제가 된 멜로디는 원래 프랑스 지방에 전해오던 민요라고 하나 작곡자는 플리스로 알려져 있다.


1778년, 모차르트는 돈벌이를 찾아 프랑스 파리에 얼마 동안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제대로 일자리도 못 찾은 상태에서 어머니를 잃게 된다. 그 무렵 이 멜로디를 접하고는 몇 년 뒤 그 선율을 주제로 다채롭게 변화시킨 12개의 변주곡을 작곡한 것이다


<아, 말씀드릴게요, 어머니>는 모차르트의 변주곡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알려져 독일에서는 "Ist das nicht ein Schnitzelbank", 영국과 미국에서는 "Baa baa black sheep", "Twinkle twinkle little star", 그리고 'ABCDEFG...'하는 <알파벳 송>으로까지 여러 형태로 불리고 있다.


결론적으로 '반짝반짝 작은별'이란 제목은 이 멜로디를 딴 미국의 동요제목에서 가져온 것이지 원래 이름은 아니며, 모차르트는 변주곡형태의 작곡은 했지만, 원곡의 작곡자는 아니란 이야기이다.


 


 


 


 


 


 


2. 소녀의 기도는 쇼팽이 작곡했다?


보통 피아노를 어렸을 적 쳤던 사람들은 피아노 소품집에 있던 곡을 많이 쳤을 것이다. 은파, 우편마차, 금혼식 등 곡을 꼽자면 매우 많다. 그 중 소녀의 기도가 가장 유명한 곡이라 할 수 있는데, 심지어 학교의 종도 이 곡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 곡의 작곡자는 폴란드의 바다르체프스카(Tekla Badarzewska-Baranowsk, 1838~1861)라는 소녀다. 바다르체프스카가 소녀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녀가 1861년 9월 19일 꽃다운 23살의 나이로 그만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1856년. 그러니까 그녀의 나이 18세 때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불어로 'La priere d'une vierge(소녀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처음 악보가 출판되었으나 대중과 비평가 모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피아니스트도 아닌 무명 소녀의 습작같은 소품따위에는 손이 미치지 않은 것이였다. 


그러나 3년 뒤 1859년 파리의 음악 뉴스 잡지(Revue et gazette musicale) 편집자 눈에 이 곡이 띄어 잡지의 부록으로 파리 사람에게 소개되었다. 그리고 반응은 폭발적이였다. 당시 파리 사람들은 어려운 예술 음악 못지않게 일종의 홈 뮤직을 바라고 있엇다. 그 악보 때문에 잡지는 연속 증판을 거듭해야 했고, 영국, 독일, 이탈리아, 미국은 물론 전세계 80개의 출판사가 다투어 악보를 출판했다. 또 피아노 연탄용이나 플루트, 클라리넷, 바이올린 등 다양한 버젼의 악보도 출판 되었다.


짧은 악상으로 변주되는 형식의 이 곡으로 그녀의 성격을 추정해보았을 때 아마도 병약하지만 다감(多感)한 소녀였으리라 짐작된다.


 




 


3. 업라이트 피아노가 그랜드 피아노 보다 더 먼저 만들어졌다?


피아노는 18세기 초 피렌체의 악기제조자 크리스토포리가 처음 만들고 18세기 중반 프리드리히대왕 앞에서 바흐가 처음 시주했다. 1709년 피렌체의 악기제작자 B.크리스토포리가 최초로 피아노를 제작하였을 때, 그는 그 악기를 <강약을 줄 수 있는 하프시코(Gravicembalocolpianoeforte)라 이름붙였다. 여기에서 피아노 포르테 또는 포르테피아노라는 이름이 생겨났고, 다시 피아노라 약칭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피아노의 전신은 할 수 있는 하프시코드라 할 수 있는데, 하프시코드는 현을 뜯는 반면 피아노는 헤머가 현을 때리는 구조이다.


처음 만들어졌던 구조는 하프시코드처럼 현이 누워있는 그랜드 피아노식이였다. 음역에 관해서는 18세기 전반에는 4옥타브4도의 55건이 보통이었는데, 이후 차츰 확장되어 19세기 전반에는 대략 6옥타브6도, 후반에는 7옥타브3도의 88건에 달하였다. 현의 재질 개량(강철선이라든가 저음용의 卷線과, 저음현과 중·고음현을 비스듬하게 교차시켜서 치는 방식도 세기 전반에 채택되어 음량이 증대하고 울림도 풍부해졌다. 이러한 현수(絃數)의 증가와 장력의 증대에 따라 골격을 보강할 필요도 생겨 금속제의 프레임이 사용되었다. 업라이트 피아노가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4.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숭어?

 

슈베르트의 곡 중 유명한 곡인 《Die Forelle》(D. 67 1819.7)이 있다. 이것은 영어로 Trout이며, 우리말로는 숭어가 아니라 '송어'이다. 숭어와 송어는 엄밀히 서로 다른 종의 물고기이며, 명확한 표기를 하여야 겠다. 참고로 숭어는 독일어로 'Graue Meeräsche' 이다.


또 비슷한 경우로 림스키 코르자코브의 곡 중 '왕벌의 비행'이라고들 하는데, 영어로는 The Flight of the bumble bee 로서 bumble bee는 뒝벌을 뜻한다. 따라서 뒝벌의 비행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기이다.


또, 쇼팽의 곡 중 즉흥환상곡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환상즉흥곡이 옳바른 표현이다. 이 곡은 쇼팽의 4개의 즉흥곡(op.26,36,51,66) 중 마지막 작품으로 즉, 즉흥곡 장르인 작품이다. 즉흥곡은 말 그대로 즉흥적인 악상을 소품형식으로 쓴 악곡을 뜻한다.

 

 

 

 

5. 모차르트를 죽인 것은 살리에리이다?


보통 어떤 글을 읽다보면 천재와 그를 질투하는 열등생을 표현할 때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 비유하는 글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분명 영화 아마데우스(Amadeus)의 영향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많은 노력을 궁중악장의 자리까지 오른 살리에리가 보기에도 천재적인 모차르트의 재능은 너무도 비범하여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치라고 느낀 나머지 병약해진 모차르트에게 죽음의 레퀴엠을 의뢰해 서서히 죽이는 식의 연출이 나온다.


림스키 코르자코브가 오페라로 만든 원작인 푸시킨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작품에서도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재능을 시기한 나머지 독살시키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사실 허구에 불과하다. 어디에도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기록은 없으며, 오히려 살리에리는 매우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사실 영화 속 음악가들의 이야기는 허구성이 매우 짙다. 베토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불멸의 연인'도 대부분 극적인 이야기를 위해 꾸며낸 장면이 많다. 물론 모차르트의 천재적인 재능은 당시 모든 음악가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모차르는 지병으로 35세의 나이에 1791년 12월 빈에서 사망했다. 이 해는 피아노 협주곡 No.27, 라 클레멘차 디 티토, 마술피리, 클라리넷 협주곡 K.622, 레퀴엠 등 모차르트의 곡 중 최고의 명작들이 작곡된 해이기도 하다.

 

 

 

6. 모차르트는 가난했다?


흔히들 모차르트는 만년에 생활고에 시달려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한 것을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기념해 빈에서 열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자료전'의 전시 자료들은 그가 당시 사회의 상류층으로서 유복한 생활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보면 여행이나 사회 활동 경비를 마련하기위해 친구들로부터 수없이 돈을 빌리고 그의 가족도 적어도 11번이나 이사를 해야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당시 그가 연간 벌어들인 수입은 1만 플로린으로, 오늘날 미화 4만2천달러에 해당한다. 18세기 빈의 고소득 랭킹 상위 5%에 속했을 뿐 아니라 성공한 직업인이 연 450플로린으로 풍족하게 살았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고소득자였던 셈이다.

음악 인생의 절정기였던 28세부터 31세까지 빈에서 살았던 모차르트는 귀족들을 대상으로 피아노를 가르쳤다. 당시로서는 그의 사치스런 생활을 유지하는데는 아주 매력적인 직업이었다.


빈의 유명한 '무지크베라인'에 전시된 새로운 문서들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돈을 많이 벌기도 했지만 도박과 낭비벽이 심해 재산은 모으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모차르트가 항시 빚에 쪼들려 어렵게 살았다는 역사가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면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후원자들과 출판업자, 그리고 친지들에게 빚을 정리하는데 필요하다며 거액을 빌려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자필 편지들도 새로 발견된 자료들 가운데 섞여 있다.


22세때인 1788년 1월 음악 후원자인 미하엘 푸치베르그에게 쓴 한 편지는 모차르트가 "이번에 한번만 친절을 베풀어 준다면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작업을 할 수 있을 텐데.."라고 적고 있다.


모차르트는 자신이 병상에 있으면서 남은 재산을 마저 탕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잘츠부르크의 국제 모차르트 재단 연구원들이 모차르트의 재산 기록을 분석한 결과, 그가 1791년 35세를 일기로 숨졌을 때는 장례를 치를 돈마저 없었으며 양복점, 구두점, 약국 등 곳곳에 빚이 연걸리듯 했다는 것이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라는 명성과는 달리 빈의 극빈자들이 이용하는 성마르크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 때문에 그가 평생을 금전적으로 힘들게 살았을 것이라는 인식을 굳혀주고 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성격상 너무 돈을 몰랐기 때문에 돈을 모으지 못했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의 작곡가이자 음악사를 연구하는 알렌 크란츠는 모차르트가 성격적으로 너그러운데다 충동적이며 누구에게나 아낌없이 퍼주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항상 돈이 없어 쪼들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크란츠는 최근 모차르트 전기에서 "모차르트는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라지 못했다. 돈은 마치 물처럼 그의 손을 거쳐갔다"면서 "심지어는 유순한 어머니 마저 볼프강은 친구만 사귀었다하면 즉각 목숨까지도 내주고 싶어한다며 불평을 했었다"고 기술했다.


출처 : http://cafe.daum.net/SPOFriends/CnOO/203?q=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클래식 음악 상식